왜관은 모두 폐쇄하고 부산포에만 단일 왜관제도를 설치한 후, 임진왜란 때 일시 폐쇄되었다가 임란 후 몇 차례 장소를 옮긴 후 1678년 초량왜관이 신축되었으며, 1872년 메이지[明治]정부에 의해 점령될 당시까지 양국의 외교 ·무역의 중심지로 존속되었다. 그리고 양국에서는 왜관에 관리를 파견하여
왜관(부산포, 제포, 염포)이 임진왜란 후 두모포 왜관으로 다시 1678년 초량왜관으로 변화한 것은 모두 조선이 허가해 준 것인데 이를 ‘소씨왜관’이라 하여 대마도주의 사적왜관으로 기술함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등한 관계를 맺고”라는 부분은 일본과 조선의 대등한 관계가 계속 지속된 것이
➃ 화명동 고분군
부산시 북구 화명동 일대 이곳에 옛 무덤이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도굴꾼들에 의해 파헤쳐진 묘소의 부장품 조각들을 보고 알 수 있었으나 학계에서는 1972년에 정식으로 발굴 조사하였다. 고분은 동산의 능선을 타고 군집하여 있었는데 산의 능선에 무덤을 안치하는 것이 가야
Ⅰ. 화이(華夷)사상과 조공체제
1. 화이(華夷)사상
&중국(中國)과 중화(中華)
한(漢)대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은 한족이 건립한 중앙왕조를 중국(中國)이라 칭했으나, 이것은 오늘날과 같은 국호(國號)로서의 중국은 아니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후 비로소 중국을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약칭인 국
Ⅰ. 화이(華夷)사상과 조공체제
1. 화이(華夷)사상
➡중국(中國)과 중화(中華)
한(漢)대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은 한족이 건립한 중앙왕조를 중국(中國)이라 칭했으나, 이것은 오늘날과 같은 국호(國號)로서의 중국은 아니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후 비로소 중국을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약칭
왜구
왜구란 13~16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에 출몰했던 일본 해적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고려 말, 정치의 혼란기에 크게 소란을 피웠다. 이때에는 일본에서도 정치적 혼락기를 맞아 이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더욱 날뛰었다. 고종 때부터 삼남 지방의 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는 공민왕
9월 12일 [양력 10월 16일]<무진>
<장계에서> 당항포 승첩계본을 받들고 올라간 전생서(전생서:궁 중의 제사에 쓸 짐승을 기
르는 일을 맡아보는 종6품의 주부) 이 봉수(이봉수)가 가지고 내려온 우부승지(이국)의 서장
내용에, " 전쟁이 일어난 이래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패퇴하였는데, 이번 당항포 싸
일기(燕行日記)』가 전하고 있으며 이 체험과 관련된 시조 1수도 발견되고 있어 흥미롭다. 이 세 작품의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 봉황성(鳳凰城) 돌아들어 고향 어디메오./ 팔도하(八渡河) 가에 갈잎에 자리 보아/ 삼경(三更)에 겨우 든 잠을 여울 소리에 깨과라.
⒝ 난하(ଽ
1.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그저 지난날의 있었던 일들을 안다는 것이 아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저명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단순히 책
5) 『열하일기』의 표현 방식
『열하일기』의 일기체 부분은 날마다 경험한 일을 기록하였지만 단순한 사건의 기록만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일기체 부분에 자신의 심리 변화도 표현하였고 또 그 변화도 날짜가 지남에 따라 점차 바뀌면서 앞과 뒤가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김동석